[人사이트 우리에겐 정규가 있다]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정규 활동가를 만났어요

신입활동가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인권운동 이야기는요😁


진행: 영희, 진선 / 정리: 진선

<aside> ❤️ 부산에 번쩍, 광주에 번쩍, 그리고 지금은 서울에서, 조직국장, 정책국장, 노동권위원회까지 활동하고 있는 에너자이저! 활동이 재미있다고 말하는, 확신의 ‘장판’ 활동가! 이제 막 노숙 투쟁을 마치고 온 정규를 만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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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 기대어 있는 정규 활동가

소파에 기대어 있는 정규 활동가

1부_‘장판’ 이전의 정규

학교가 친구를 차별하고 있었다

19살에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자유의 영혼이 되었어요. 토익 새벽반을 듣고 남포동에서 조조영화를 보고, 친구들이 학교 마치면 같이 축구하고요. ‘한량’처럼 살았어요.(웃음) 그렇게 살다가 집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그러고 있지 말고 대학을 가라고 하시더군요. 밥 벌어먹는 시장에 벌써 뛰어들 생각하지 말고, 대학은 공부하러 가는 데가 아니니 대학에 가서 놀고 싶은 만큼 놀고 책임 없이 즐기는 시간을 가지라고 하셨어요. 맞는 말씀 같아서 대학에 갔는데, 막상 다니니까 재밌더라고요. 친구들하고 놀고 공부도 하고 싶은 거 하고 사회복지학 배우는 게 재밌었어요. 저는 수업 듣는 게 좋아서 앞자리에 앉았고 청각장애인인 친구는 원격 지원 프로그램을 써야 돼서 앞자리에 앉았는데, 저보고 학습 지원 도우미를 해줄 수 있냐더군요. 그렇게 학교 안에 있던 장애인 친구들을 하나씩 알게 되었어요.

장애인 친구들이 10명 안팍으로 있던 동아리가 있었는데 있었는데 당시의 목표는 대학교의 중앙 동아리로 만드는 거였어요. 노력을 많이 했는데 결국 안 됐어요. 일단 공간이 전혀 없고요. 무엇보다 학교가 동기인 친구를 차별한다는 느낌을 받는 게 가장 컸어요. 학교 안에 동아리 방이 모여 있는 연합회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어요. 청각장애인 학생이 수업을 듣는 데 필요한 장비들이 관리가 안 되고 노후화되어있는데 수도 모자랐어요. 앞에 장비를 쓰던 학생이 반납이 늦어지면 뒤에 장비를 쓰는 친구도 덩달아 지각하고. 또 학교에 경사가 굉장히 심한 부분에 안전바 설치를 안 해서 같이 활동하던 형이 다치고. 그런 걸 보면서 부당하다고 느꼈어요. 이런 고민을 하다가 군대에 갔는데 너무 갑갑한 거죠. 그때 읽었던 책 중 하나가 김도현 선생님이 쓴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예요. 진보적 장애인 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요. 그전까지는 ‘차별’이라고 느꼈던 걸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표현이 없었는데, 왜 구체화되지 않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책에) 있었어요. 그리고 ‘비마이너’, ‘함께 걸음’ 이런 장애 관련 언론사들의 내용을 쭉 보면서 이 시기를 지냈어요.

이상한 ‘놈’의 이메일에서 서울 장차연까지

전역하고 사회복지관에서 실습했을 때 너무 재밌었어요. 두 번째 전공이 법학이라 이걸 가지고도 실습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혼자 자소서를 만들어서 인권 로펌, 공익법 단체들에 보냈어요. 그때 찾았던 곳이 ‘장애인권법센터’인데, 알고 보니까 건물도 없고 김예원 변호사라는 사람이 인권법센터 그 자체였던 거죠. 이상한 놈이 이메일을 보냈다고 생각하고 답장 안 했을 수도 있는데, 김예원 변호사가 센터 상황을 알려주면서 광주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을 소개해줬어요. 동행의 이소아 변호사가 ‘혹시 우리가 광주에 있는 건 알고 있나요?’ 이러는 거예요. 전 부산 사람이니까(웃음). 근데 그때 제 기조가 북한 아니면 어디든지 간다였거든요. 당연히 돈 못 주는 거 알고 있었고 돈 안 줘도 된다. 그럼 너 잠은 어떻게 잘 거냐, 게스트하우스 잡겠다. 그렇게 그 겨울에 광주로 넘어가서 지역에 있는 인권변호사가 일하는 걸 봤어요. 저는 로스쿨생도 아니고 그냥 학부생일 뿐인데도 변호사님이 활동하는 회의에 저를 많이 데리고 가셨어요. 캄보디아에서 정치 난민으로 오신 분 사례, 학대 장애인 피해 지원, 염전노예 대응 등 소수자를 지원하는 활동을 옆에서 많이 볼 기회였어요.

그러다 목포에 ‘전남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 방문할 기회가 생겼는데 학대 피해 장애인을 지원하고 인프라와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작업이 매력 있다고 느꼈어요. 그렇게 권익옹호기관 취업을 준비하면서 비마이너를 봤는데, 서울 장차연 채용 공고가 있었어요. 장애인 권익 활동 및 장애인 일자리 등등등. 사회복지사가 아닐 뿐이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다 들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서울 장차연에도 원서를 넣었죠. 장차연에서 먼저 최종 합격이 되어서 (여기에) 온 것도 있어요. 타이밍이 잘 맞아서 이 운동에 들어온 거죠. 그때는 잘 몰라서 공단 취업도 같이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타이틀이 일단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맞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전장연 활동을 하면서 만나는 공공기관이나 공기업들은 진짜 실망스럽죠. 진짜 어떻게 저러냐 일하러 오라 해도 안 가(웃음). 서울장차연 면접을 위해 들다방(전장연 사무실과 같은 건물에 있는 사회적기업, 장애인야학의 급식을 지원하고 커피 등을 판매하고 있어요)에 갔는데, 거기서 박경석 대표가 밥을 먹고 있었어요. ‘어? 뉴스에서 보던 사람이다!’ 생각했죠. 그날 김도현 선생님도 화장실에서 만났어요.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군대에서 진짜 감명 깊게 읽었는데! 근데 아는 척은 못 했어요. 이상하잖아요. 볼일 보고 있는데 ‘책 읽었다’고 하기가(웃음). 면접은 박옥순 전장연 사무총장과 문애린 당시 서울장차연 상임대표가 참여했는데 면접 질문들이 너무 좋았어요. 이런 경험을 왜 여기서 하고 싶은지, 연대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내가 가진 가치관, 생각을 섬세하게 묻더라고요. 그때 아, 나는 여기 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정규가 맘대로 그린 인생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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